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학 농민 혁명 (문단 편집) ==== 고종의 자진청병설이 일본의 조작인가? ==== 학계 가설로 고종의 청병이 일본의 조작이란 주장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학계에서 통용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가설을 제기한 [[이태진]]도 고종이 청군차병을 허용한 것은 과오라고 평가한다는 점에서 아래에서 비판되는 2019년 무렵에 인터넷 커뮤니티에 유포된 내용은 사실 이태진의 가설과도 다르다. 소수설 내지는 가설 조차 아닌 출처가 모호한 속설[*⒜ 2019년에 [[트위터]], 네이버 블로그, 네이버 카페 등지에서 일부 [[역덕]]과 [[밀덕]]이 공유하여 확산된 정보로, 서지 왜곡과 학계 동향에 대한 왜곡이 포함되었다. 전파방식이 [[넷우익]]의 역사왜곡, [[천안함 피격 사건/왜곡]], [[윈스턴 처칠]]의 [[벵골 대기근|벵골대학살설]], [[장제스]] 무능설, [[레슬리 맥네어]] 악인설과 유사한 면이 있다. [[https://archive.ph/FBLu7|역덕들에게 유명한 사건이다.]]]에 의해 학계 동향이나 사료발굴에 대한 오류가 확산된다. 이런 류의 글들은 자료의 출처가 모호하거나 아예 기재되어 있지 않으며, 오히려 연구자들의 학설들과도 정면으로 대치된다. 종종 자료조작도 확인된다고 한다. 서지 정보도 50년 이상 오류가 난다. 서지사항을 전문적으로 검토할 때 당연히 시기별 학계 동향이나 사료 발굴 시기를 고려해야 하는데 해당 글들[*⒜]은 [[단군기원]]을 사용한 1957년 [[국사편찬위원회]] 발행 자료가 2019년 최신 발굴됐다는 황당한 정보까지 유포된다. 이때문에 정말 새로이 발굴된 사료에 의한 최신 학설인 줄 알고 유포하기도 한다. * 자료조작 ---- * '''주한일본공사관기록 문서 조작''' 주한일본공사관기록 문서에서는 분명 고종이 청에게 청군차병을 한 것으로 나와있고 여러 연구자들이 직간접적으로 해당 사료를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2019년에 퍼진 속설[*⒜]에 의하면 ‘최신 발굴한 주한일본공사관 문서에 의하면 고종은 출병요청을 한 적이 없고 원세개가 단독으로 요청한 사실이 드러났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속설[*⒜]에서는 그 주한일본공사관기록 문서가 어디서 가져온 것이지 출처는 설명을 하지 못 하고 있다. 혹은 주한일본공사관 문서의 출처를 [[한 연구보고서|“주한일본공사관기록 문서”라고만 적으면 출처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들에 비해 김명섭, 구선희, 강문호, 엄찬호, 신영우, 김경록 등의 연구자들은 주한일본공사관기록 문서의 출처가 어디인지 정확하게 서술하고 있다.[* 김명섭, 1994, 12 김명섭, 제1차 갑오농민전쟁기의 차병론과 경장론, 학위논문(석사)-- 단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한국사전공, 서울: 단국대학교, 1994, page 12][* 구선희, 1999, 222~223 구선희, 韓國近代 對淸政策史 硏究, 서울 : 혜안, 1999, page 222~223][* 엄찬호, 2006, 13 엄찬호, 淸日戰爭에 대한 조선의 대응, 한일관계사연구, Vol.0 No.25, 2006, page 13 (KCI)][* 강문호, 2004, 120~121 강문호, 동학농민혁명과 청군, 동학연구, Vol.17, 2004, page 120~121][* 신영우, 2009, 27 신영우, 1894년 왕조정부의 동학농민군 인식과 대응, 한국 근현대사 연구, No.51, 2009, page 27][* 유바다, 2017, 336 유바다,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 학위논문(박사)-- 고려대학교 대학원: 한국사학과, 서울 : 고려대학교 대학원, 2017, page 336][* 김경록, 2018, 37~39 김경록, 청일전쟁과 일제의 군사강점, 서울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8, page 37~39] * '''청의 문서와 이홍장전집 조작''' 2008년 1월 중국 안휘교육출판사(安徽教育出版社)에서 출판된 방대한 분량의 『이홍장전집』에서 총 39권에서 2,600여 만 자로 된 자료집[* 國家淸史編纂委員會文獻叢刊, 『李鴻章全集』, 北京 : 安徽敎育出版社, 2008 중 總序와 凡例]이 새로 출간했으나 여기서도 기존 사실을 뒤집을만한 기록은 전혀 나오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를 들면 유바다는 “顧廷龍․戴逸 主編, 2007, 李鴻章全集 1~39, 安徽敎育出版社”라는 방대한 분량의 사료집을 참고해서 박사학위 논문을 작성하였다.[* 유바다,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 학위논문(박사)-- 고려대학교 대학원: 한국사학과, 서울 : 고려대학교 대학원, 2017, page 411] 하지만 여기서도 고종이 청에게 청군차병을 요청하였다고 서술한다. 그리고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원인 구선희가 이홍장 전집에 대한 해제를 했었는데도 여기서도 청의 문서가 '고종의 청병차병의 증거'로 설명하고 있으며 이홍장은 오히려 조선이 뒤처리하게 놓아두고 가능하면 빨리 조선에서 철수하기를 원하였다는 자료가 나온다고 설명하였다.[* 구선희의 해제,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9, 정읍 :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2017, page 33~35] 그런데 청의 문서 역시 속설의 일환[*⒜]으로 왜곡된 내용이 전파되고 있다. 일각에 의해 전파되는 내용은 출처불명의 '''자칭''' 이홍장 전집에 의한 '''자칭''' 최신 학설이다. 그에 의하면 ‘새로 발굴된 『이홍장전집』에 의하면 음력 4월 28일에 조선정부가 청군차병을 결정하였다가 4월 29일에 철회하였는데 원세개가 분노하여 철회를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고종의 차병요청이라 왜곡해서 조선에 밀고 들어왔다. 이 자료가 발굴되지 않아 학계에서 알려지지 않았다가 최근(2019)에야 발굴됐다.’는 것이 대략적인 논지이다. 다음 속설[*⒜]의 요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음력 4월 28일에 조선정부는 청군출병을 결정했으나 4월 29일에 철회했다. 그러나 원세개는 4월 29일의 철회결정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4월 29일의 철회결정을 '조선정부가 청군출병 요청을 했다'고 해석하여 밀고 들어왔다. 이 사실은 기존에 사료가 발굴되지 않아 알려지지 않아 기존 교과서에 반영되지 못했으나 최근에 사료가 발굴됐음으로 '고종이 청군을 불러서 백성을 학살했다'는 설에 카운터를 날릴 수 있다. 하지만 속설[*⒜] 외에는 출처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이 글들은 이홍장 전집 문서의 출처를 [[한 연구보고서| "이홍장 전집"이라고만 적어놓고 무조건 출처라고 주장하고 있다.]] 기밀문서의 출처가 어디냐고 질문하는데 "기밀문서"라 적으면 출처라고 주장하는 격. 하지만 이홍장전집이라면 달려있을 문서의 번호를 전혀 설명하지 못 하는데 분명 이홍장 전집에는 문서마다 번호가 존재한다. 왕왕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9』의 발췌본을 참고하고 이홍장전집을 출처로 했다고 유포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에서도 전문가의 설명을 포함해서 일각의 설명이 없다. 그리고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9』를 출처로 한 것이면 이홍장전집을 출처로 한 것도 아니다. 『이홍장전집』은 총 39권에서 2,600여 만자라는 분량인데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9에서 수록된 건 그중 극소수분량을 발췌한 내용일 뿐이다. 그러므로 극소수 분량을 발췌한 내용에 대한 번역을 『이홍장전집』을 본 것이라 하는건 자료의 성격이 무엇인지 모르고 인용했다고 말하는 셈이다. 실제로 거대한 분량인 『이홍장전집』 1권~39권을 참고한 연구자는 유바다 같은 연구자의 논문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러한 속설[*⒜]에서는 선행연구 같은건 (논문 등이 무료로 공개되어있음에도) 읽지않으며 트위터, 블로그, 카페를 출처로 한 신뢰성 없는 내용을 학석 내지는 연구라 주장한다. 그리고 역시 속설[*⒜]에서는 '이홍장이 작성한 문건'이라 주장하는 문서가 존재한다. 하지만 이 유포된 글들에선 문서의 출처는 제시하지 못하는데 이 글들이 주장하는 문서 내용의 일부이다. >조사해보면, 임오년과 갑십년에 폐국에서 두 차례 내란이 일어났을 때 모두 중국의 병사들이 대신 평정해 주었습니다.(중략) >---- >원세개가 보낸 글이라고 왜곡된 문서의 일부 그러나 이 문서의 정체는 G20-05-001은 __실제로는 고종 측이 청에게 보낸 문서__이며 실제 __김명섭, 구선희, 강문호, 엄찬호, 신영우, 유바다 등의 연구자들은 분명 논문에서 고종측이 보낸 문서라 설명한다__'[* 김명섭, 1994, 12~13 김명섭, 제1차 갑오농민전쟁기의 차병론과 경장론, 학위논문(석사)-- 단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한국사전공, 서울: 단국대학교, 1994, page 12~13][* 구선희, 1999, 227 구선희, 韓國近代 對淸政策史 硏究, 서울 : 혜안, 1999, page 227][* 강문호, 2004, 127~128 강문호, 동학농민혁명과 청군, 동학연구, Vol.17, 2004, page 127~128][* 엄찬호, 2006, 7 엄찬호, 淸日戰爭에 대한 조선의 대응, 한일관계사연구, Vol.0 No.25, 2006, page 7 (KCI)][* 신영우, 2009, 27 신영우, 1894년 왕조정부의 동학농민군 인식과 대응, 한국 근현대사 연구, No.51, 2009, page 27][* 유바다, 2017, 337 유바다,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 학위논문(박사)-- 고려대학교 대학원: 한국사학과, 서울 : 고려대학교 대학원, 2017, page 337] 즉 해당 문서가 원세개가 보낸 문서라는 속설[*⒜]들은 서지사항을 변조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실제 번역된 문서에 의하면 내용이 전혀 다르다. 음력 4월 28일에 고종은 신하들에게 동의받아야 할 공식적인 결정도 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청군출병 요청을 원세개에게 전달했으나 제대로 된 문서를 갖추지 않았다. ('''G20-04-034''') 같은 28일에 다른 신하가 고종의 결정에 반대해서 문서를 보내지 않았다. ('''G20-04-036''') 4월 29일에 조선정부는 청군출병을 요청하는 문서를 이미 완성했음을 원세개에게 전했다. ('''G20-04-037''') 그리고 원세개는 4월 30일에 방금 문서를 받았다고 보고를 하였고 그 문서가 청군출병 요청서라는 걸 전달하고 고종이 보낸 문서를 그대로 전달했다. ('''G20-05-001''')[*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9』 105~110)] 청의 문서에는 그 어디에도 '(음력) 4월 28일에 조선정부가 파병을 결정하고 29일에 파병을 철회했는데 원세개가 29일의 철회결정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주장을 보내어 청군출병을 요청했다' 같은 내용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문서 내용이나 김명섭, 구선희, 강문호, 엄찬호, 신영우, 유바다 등의 연구자들이 분명 고종이 보낸 문서라 설명하는 증거자료이다. 그리고 출처가 없는 자칭 ''이홍장전집"과 같이 제시되는 출처가 육군본부의 육군본부의 《한국군사사》인데 본 문서에서 직접 인용된 내용처럼 실제 서적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 출처없는 자칭 전집과 조작된 출처 외에는 사실상 출처가 없는 것이다. * 과거 학계가 모르는 최신 사료 발굴(2019년 기준)이란 허위정보 ---- 청의 문서와 주한일본공사에 근거한 '고종의 청병 왜곡설'은 1999년에 나와 학계에 검토 받았으나 여전히 비주류설이며 다수 학자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속설[*⒜]에 의하면 이것이 '최근' 발굴이나 학설이라는 허위정보가 존재한다. 그리고 상술했듯이 서지사항 왜곡도 동반된다. * 학계가 파악하지 못했던 《양호초토등록》이 최근 발굴? 이 속설[*⒜]에 의하면 《양호초토등록》이 2019년, '최근'에 '발굴' 됐다고 한다.[* 유포된 내용이 무엇인지 [[대체역사 마이너 갤러리]]에서 기록된 게 있다. [[https://m.dcinside.com/board/alternative_history/325203|대체역사 마이너 갤러리]] "과연 조선은 동학농민운동 때 청에 원병 지원을 요청했는가? 에 대한 것입니다. 일단 대체적으로 고종이 직접 원병을 불렀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정설처럼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 발굴한 양호초토등록이나 주한일본공사관 문서, 프랑스 외교문서 등을 보면 또 고개를 갸우뚱할 만한 기록들이 넘쳐납니다." 여기서 프랑스 문서는 1차 출처가 네이버 블로그이며 블로그 외에는 출처가 없다. 프랑스 외교 문서의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 프랑스 외교 문서 위조' 참조. 실제로는 외국인 아무개의 반응을 외교 문서라고 조작한 것이다. 물론 2010년 기준에서도 옛날 문서다.] 그러나 >저자 '''[[국사편찬위원회]]''' > >발행사항[과천] : 국사편찬위원회, '''단기4290'''[1957] > >발행연도 '''1957''' > >DDC 951.04 > >목차 (Table of Contents) > >목차 >서문 = 1 >갑오실기 = 1 >갑오약력 = 63 >금영래찰(도원) = 77 >동(운양) = 85 >곡성군수보상 = 99 >취어 = 101 >동도문변 = 155 >'''양호초토등록 = 161''' >선봉진일기 = 219 >양호우선봉일기 = 259 >선봉진서목 : 부령관·별군관·수령서목 = 335 >순무선봉진등록 = 381 >[[http://www.riss.kr/link?id=M1131387|#]] 실제로는 1957년에 '''[[국사편찬위원회]]'''가 발행한 자료집에 그대로 실려있다. 심지어는 '''단군기원'''을 사용하는 시기에 발행됐다. 단군기원을 사용한 1957년에 국가기관에서 발행한 도서를 속설[*⒜]에서는 2019년에 발굴한 최신 사료라고 주장한 것이다. 1957년 단군기원 사용시대에 정부기관 사료집에 기본적으로 포함된 자료조차 최근 발굴이라고 소개한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사이비 사학과 그 맥을 같이 한다. * 과거 학계가 모르는 주한일본공사관 문서가 최근 발굴? '''최근''' 발굴된 주한일본공사관 문서에서는 고종이 요청한 게 아니라 원세개의 독단적 출병이라는 사료가 발굴됐다'는 왜곡이 19~20년 무렵에 확산되었으나 '''실은 1980년부터 인용된 바 있다.''' '주한일본공사관'문서는 박종근의 《청일전쟁과 조선》(1982)에서도 인용하며 일본외교문서와 청의 문서를 인용해 '고종의 청군자진출병'을 서술한다. 이미 발굴을 넘어 사료정리집이 나온 시기가 90년대다. >주한일본공사관 기록 > >영인본 >'''1988~1994년''' > >교서본(교서・탈초・입력) >'''1986~2000년''' >[[http://db.history.go.kr/introduction/intro_jh.html|#]] 문서 발굴 시기가 아니라 사료집 '''발매시기가''' 위와 같다. 90년대에 이미 사료가 정리된 자료를 2019년 '최신' 발굴이라고 주장한 터무니 없는 속설[*⒜]의 실체이다. * 과거 학계가 모르는 이홍장 문서가 최근 발굴? 같은 속설[*⒜]의 다른 자료왜곡에서는 ''''최근''' 발굴된 이홍장 전집에선 고종이 요청한 게 아니라 원세개의 독단으로 출병한 것이라는 사료가 '''발굴됐다''''는 2019년 속설이 돌았으나 역시 출처는 그 속설이 전부. 해제에서 설명한 것 처럼 문서번호만 언급하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새로 발술됐다는 문서번호를 언급하지 못한다. 위의 구선희의 이홍장 문서 해설에도 동학농민전쟁 당시 파병문제로 새로운 사료가 발견됐다는 내용이 일체 없다. 이홍장 전집에선 새로 발굴된 사료가 일부 포함될 뿐 문서집이 새로 발굴된 자료 모음집이 아니고 동학의 비중은 이 문서집에서 극소수다. 즉 이홍장 전집 ≠ 새로 발굴된 이홍장 문서 ≠ 동학에 대한 이홍장 전집 이다. 2008년 1월 중국 안휘교육출판사(安徽教育出版社)에서 출판된 방대한 분량의 『이홍장전집』에서 총 39권에서 2,600여 만 자로 된 자료집[* 國家淸史編纂委員會文獻叢刊, 『李鴻章全集』, 北京 : 安徽敎育出版社, 2008 중 總序와 凡例] 으로 이 중에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발행 도서 『동학농민혁명신국역총서9』에서 포함된 자료는 극소수이다. 즉 출처라 서술할 것이면 『동학농민혁명신국역총서9』라고 적어야 옳은 걸 속설에서는 방대한 문서집을 출처로 한 것이라 허위사실을 기재한 것. 그리고 국역총서의 구선희의 해제 중 그 어느 내용에도 동학과 관련된 사료 최신 발굴이란 내용이 없다. 즉 동학농민혁명 관련 청 측 문서가 최근(2019년) 발굴됐다는 내용의 출처는 속설들 뿐이다. [*⒜] 그리고 위의 설명된 이홍장 전집 내의 청의 문서는 90년대 구선희의박사학위 논문(개화기 조선의 대청정책 연구)에서 개별로 인용된 것이 확인된다. 이홍장 전집의 존재 이전에도 학계에서 인용됐다. 그리고 실제 번역된 위의 이홍장 전집 내의 문서나 구선희 설명을 읽어보면 '고종이 요청한 게 아니라 원세개가 독단으로 불러들인 것이라는 증거' 같은 이야기는 전무하고 오히려 '조선이 출병을 요청했다'고 서술된다. * 청의 문서에 대한 뒷북과 과거학설 왜곡 참고로 고종이 절차에 의해 공식으로 요청서를 보내기 전에도 청군은 출병할 의지가 가득했다. 그런데 이것을 가지고 ‘기존학계에서 발굴되지 않아 교과서에 실리지 않다가 최근(2019년)에 새로운 청의 사료가 발굴되었다.’는 뒷북이 근래의 속설을 중심으로 돌았다. 이 속설에 의하면 원세개가 능동적으로 출병준비를 하였다는 청의 문서를 제시하며 2019년 최신발굴이라거나 최신설이라는 주장하는데 그 출처마저 그 속설[*⒜]뿐이다. 한단계 더 나아가 ‘고종이 출병요청하지 않았는데 사료발굴이 안 돼서 학계가 몰랐다’는 소문이 있다. 그러나 출처없는 소문과 달리 원세개의 파병의지 사실은 학계에서 한참전에 파악한 내용이다. 조선이 파병요청을 할 경우 조선에 청군을 파병하여 조선내정에 관여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할 목적이 있었다, 같은 문서와 사실은 이미 학계에서 한참 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다.[* 엄찬호, 淸日戰爭에 대한 조선의 대응, 한일관계사연구, Vol.0 No.25, 2006, page 8~9 (KCI.)][* 구선희, 韓國近代 對淸政策史 硏究, 서울 : 혜안, 1999, 224~225 ] 물론 이 논문들에서도 청이 군대 출병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는 사실은 확실히 설명하고 넘어간다. 실제로 이홍장이 파병 여부를 신중하게 검토했다는 건 청 내부의 자료에서 확인된다.[* 엄찬호, 淸日戰爭에 대한 조선의 대응, 한일관계사연구, Vol.0 No.25, 2006, page 8~9 (KCI)] * 최근 학설이라 교과서에 반영되지 않았다? '사료가 최신에 발굴돼 최신학설이 교과서에 반영되지 않았다.'(2019년)는 비난은 사실이 아니다. 특히 '이홍장 전집이 최근에 번역돼서 교과서에 반영되지 않았다.'는 말은 거짓이다. 이 설명은 명백한 말장난인데 국내에 극소수의 발췌된 동학관련 편집본이 번역으로 출간하는 것과 국내학자들이 중국어 문서를 연구에 인용하는 건 별개다. 중국어 사료도 못 읽는 사람이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 정도의 연구를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2018년에 [[동북아역사재단]]의 한국의 대외관계와 외교사 근대 편 이 출간됐으나 여전히 고종이 원세개, 민영준과 더불어 청군 출병의 주체라 설명된다. [[동북아역사재단]] 한국외교사편찬위원회가 서적을 발간한 목적은 다음과 같다. >이번에 발간하는『한국의 대외관계와 외교사』는 우리 역사에 나타난 사실과 행위들을 우리의 시각에서 체계화함으로써 한국 국제정치학 발전의 __새로운 토대를 구축한다__는 의의를 갖는다.(...) > >본서는 한국의 대외관계와 외교사를 고대•고려•조선•근대 등 총 4편으로 나누어 편제하고, 각 시기 별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치적 환경의 변화와 그에 조응한 국내정치의 변화•발전의 양상을 규명하고자 했다. 특히 본서의 집필에는 국제정치학 뿐 아니라 한국사•일본사•중국사 등 다양한 분야의 권위있는 연구자 50여명이 참여했다. __이와 같은 방대한 규모의 집필진을 동원한 한국 외교사 통사 서술 작업은 우리 학계 초유의 일__ >---- >[[동북아역사재단]] 한국외교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의 대외관계와 외교사 근대 편, 2018, 6-9쪽 본서는 새로운 토대를 구축하며 학계 초유의 일이라 설명될 정도로 학계 전문가들이 참여한 학술서다. 이 학술서엔 분명 고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청병차병에 대한 결정을 보지 못하자 고종은 비밀리에 성기운을 원세개에게 보내 상담하면서 청병차병을 암암리에 결정했다. '''결국 청병차병은 왕권을 유지하려는 고종과 정권의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민씨세력의 실권자 민영준, 그리고 외압세력의 대표 원세개 사이에서 담합이 이루어져 결정되었다.''' >---- >[[동북아역사재단]] 한국외교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의 대외관계와 외교사 근대 편, 2018, 473쪽 청병차병 결정에 대한 편찬을 맡은 연구자 구선희 박사이다. 즉 위의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9권 이홍장 전집 발췌 편집본을 해제한 박사와 동일인이다.''' 겨우 동학관련 발췌 본의편집본(원본 전집에서 극소수 분량)이 2017년에 번역됐으니 '최근 학설'이 그 이후 나왔다는 설명부터 말장난이다. * 육군본부의 《한국군사사》가 출처? 고종의 자진출병요청설 허위설의 출처도 왜곡됐다. 이 속설[*⒜]에서는 그 출처가 《한국군사사》라고 애매모호하게 주장하는데 이것도 서지사항이 엉터리로 되어있다. 발행연도, 발행자는 물론 몇권인지도 기재하지 않는 등 출처를 엉망인데 한국군사사 중 동학농민혁명을 다룬 것은 '육군본부, 《한국군사사》9(2012)'이다. 그러나 실제 '한국군사사'에서는 전혀 다른 내용을 서술하고 있다. >동학농민군에 의한 전주점령 직후부터 정부의 차병 논의는 본격화되었다. 동학농민군을 ‘미친벌떼와 궁한 개’로 비유한 선혜청 당상 민영준은 무기력한 중앙군과 지방군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에 대적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4월 28일 전주 함락의 보고를 듣고 민영준을 국왕의 내락을 받아 위안스카이에게 차병안을 제의하였다. 집권 민씨세력은 초토사 홍계훈의 청에 따라 청국 ‘천병’의 힘을 빌려 이들을 토벌토록 하는 방안을 마련하고 비밀리에 이를 관철시키고자 하였다.(…) 농민들의 봉기원인을 직시하고 있던 영돈령부사 김병시는 “수렴정치에 견디지 못하여 백성이 기뇨한 것을, 바로 동학도에게 그 책임을 돌려서 수천명을 살상한 것도 참지 못하겠거니와, 여기서 청병을 청원한 것은 또 하나의 실책이다. 다른 나라의 군사를 빌려서 우리 백성을 살해한다는 것이 어찌 있을 수 있는 일인가”라고 하면서 민영준 등의 차병주장을 힐책했다. > >그런데도 청국군을 부르는 것이 당시 집권세력층의 입장에서는 부득이 취할 수 밖에 없는 선택이었다. 4월 30일 조선정부에서 청나라에 정식으로 공문을 보냈다. 정부는 위안스카이를 통해 군사파견 요청서를 전달하였고, 이에 따라 청국은 군함을 곧바로 조선에 파견하였다. >---- >육군본부 육군군사연구소, 한국군사사 9 근·현대 1, 계룡: 육군본부 군사연구소; 서울: 경인문화사, 2012, page 253~254 즉 《한국군사사》를 출처로 한 내용이 아니다. 이홍장전집, 한국군사사 둘다 실제 출처가 아니다. * 존재하지 않는 프랑스 외교 문서 위조 고종 옹호자들은 프랑스 정부의 문서가 있다고 조작하기도 한다. 하지만 실상은 >(28) [조선사변에 관한 청국내 외국인의 의향보고의 건] >기밀제8호 >이번 조선 내란으로 인한 일·청 양국의 출병에 관한 건에 대하여 이곳에 있는 주요한 외국인들이 말하는 말투를 보면, 영국인은 청국이 한국 정부의 요구에 응하여 출병한 것은 정당한 일이고, 일본이 이 때문에 이의를 제기할 이유가 없고, 따라서 일·청 양국은 모두 폭동이 진정되면 조속히 따로따로 군대를 철수하면 그만이라고 하였습니다. 프랑스인은 한층 더 상세하게 평을 하였는데, 원래 이가 파병하게 된 원인은 조선 국왕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원세개의 재량에서 나온 것이며, 또 이홍장이 출병 전 경성주재 외국공사와 영사가 모두 청병의 보호를 희망하고 있었던 것 같이 말하지만 이는 전적으로 근거가 없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또 독일인은 영국인과 별로 차이점이 없었으나, 일본이 공관과 자국민의 보호를 위하여 출병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 >"(28) [朝鮮事變에 관한 淸國內 外國人의 意向報告의 件]" 駐韓日本公使館記錄 4권, [[http://db.history.go.kr/id/jh_004r_0040_0280]] 실상은 '''청국 내 외국인''' 중 프랑스인의 반응을 전달했을 뿐이고 해당 외국인 여론과 반응이 일치한다는 프랑스 외교문서에 대해서는 아무런 입증도 하지 못 한다. [[대한민국]]으로 치면 [[이명박]] 시절의 국민들이 [[광우뻥]]을 믿거나 [[천안함 음모론]]을 믿는 여론이 존재한다는 사례를 가지고 대한민국의 행정 문서라고 조작하는 것과 동급이다. * 과거 학계가 모르는 최신 학설? ---- 그리고 청의 문서와 주한일본공사에 근거한 '고종의 청군출병자진요청 일제의 조작설'은 1999년에 나와 이미 학계에 검토를 받았다. '이태진(1999), "1894년 6월 淸軍 朝鮮 출병 결정 과정의 眞相: 조선정부 자진 요청설 비판"'이 그것이다. 이태진은 본인이 기존 학설을 비판했다고 명시한다. 즉 이 논문은 저자가 직접 비주류설임을 명시했는데 논문에서 '주한일본공사관 문서에 의한 실증'을 강조하고 있다. 이미 강조하는 논문이 1999년에 나왔음을 알 수 있다. 이 논문에선 기존학자들이 문서를 오독했다 주장한다. '''즉 '최근발굴'같은 설은 이태진도 하지 않았다.''' 이태진은 직접적으로 기존의 통설이 식민사관의 아류라 주장하고《고종시대의 재조명》(2000)의 서문에서 통설을 '''침략사관설'''(5쪽)이라 주장한다.[* 다만 이 경우는 고종에 대한 부정적인 설을 포괄한 것이다.] 그러나 본인도 인정한 것처럼 이태진의 주장을 입증할 증거가 없다. >이상에 의하면 6월 3일 국왕은 다음과 같은 조건 아래 청병에 동의하게 되었던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 >첫째,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한 일차적 대응은 위안스카이가 순무 초토사의 병력을 직접 지휘하는 것으로 한다. >둘째, 조선정부의 요청으로 출병하는 청군은 동학농민군의 동향을 보고 하륙하여 움직인다. >셋째, 청군 출병이 동학농민군의 기세를 조기 제압하는 효과를 달성하고 청군이 한성에 진입하지 않는다면 만국공법이 정하는 외국병이 수도에 진입할 수 있는 조건에 따르면 일본을 비롯한 어느 나라 병력도 한성에 들어올 수 있는 구실은 없다. > >'''위의 두번째 조건은 기록상 확실하게 입증해주는 것이 없다.''' 단지 위안스카이의 현장 지휘가 처음부터의 조건부였다면 출병 청군이 농민군 진압의 일선을 담당하기 위한 것이었다고는 볼 수 없다. 아산만에 도착한 청군은 실제로 동학농민군과 교전상태에 들어간 적이 없다. 그렇더라도 '''위와 같은 정도의 조건에서 고종이 청병을 허용하는 판단을 내렸다는 것은 결코 잘한 처사라고는 할 수 없다.''' >---- >이태진, 고종시대의 재조명, 서울 : 태학사, 2000, 221 이태진도 본인의 가설에 입증할 기록은 없으며 __고종이 청병을 허용한 잘못된 처사를 한 것은 이태진도 인정하고 있다.__ 그리고 대다수의 연구자들은 '고종의 청군출병자진요청 조작설'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태진은 이후 2010~2013년에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이였다. '''당시 교과서에 핵심적인 영향력이 있었으나 당시에도 교과서의 설명은 수정되지 않았다.''' 이태진의 '고종의 출병자진요청설 일제의 조작설'은 여전히 비주류설이었다. 이점은 육군본부 육군군사연구소가 기획한 '한국군사사'에서도 확인된다. 당시 '한국군사사' 는 이태진 국사편찬위원장이 편찬위원장이었다. 즉 이태진은 국사편찬위원장+육군군사연구소 기획 학술서의 편찬위원장이었다. [[http://m.munhwa.com/mnews/view.html?no=2012112601032630074006|고조선서 광복군까지… 軍制·전쟁기술 총망라]] 그러나 이태진의 주장은 여기서도 인정받지 못한다. >동학농민군에 의한 전주점령 직후부터 정부의 차병 논의는 본격화되었다. 동학농민군을 ‘미친벌떼와 궁한 개’로 비유한 선혜청 당상 민영준은 무기력한 중앙군과 지방군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에 대적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4월 28일 전주 함락의 보고를 듣고 민영준을 국왕의 내락을 받아 위안스카이에게 차병안을 제의하였다. 집권 민씨세력은 초토사 홍계훈의 청에 따라 청국 ‘천병’의 힘을 빌려 이들을 토벌토록 하는 방안을 마련하고 비밀리에 이를 관철시키고자 하였다.(…) 농민들의 봉기원인을 직시하고 있던 영돈령부사 김병시는 “수렴정치에 견디지 못하여 백성이 기뇨한 것을, 바로 동학도에게 그 책임을 돌려서 수천명을 살상한 것도 참지 못하겠거니와, 여기서 청병을 청원한 것은 또 하나의 실책이다. 다른 나라의 군사를 빌려서 우리 백성을 살해한다는 것이 어찌 있을 수 있는 일인가”라고 하면서 민영준 등의 차병주장을 힐책했다. > >그런데도 청국군을 부르는 것이 당시 집권세력층의 입장에서는 부득이 취할 수 밖에 없는 선택이었다. 4월 30일 조선정부에서 청나라에 정식으로 공문을 보냈다. 정부는 위안스카이를 통해 군사파견 요청서를 전달하였고, 이에 따라 청국은 군함을 곧바로 조선에 파견하였다. >---- >육군본부 육군군사연구소, 한국군사사 9 근·현대 1, 계룡: 육군본부 군사연구소; 서울: 경인문화사, 2012, page 253~254. 이라 설명된다. 이태진의 주장은 주석으로만 따로 설명되고 본문에서 인용되지 못한다. 이태진은 영향력이 높은 학자임에도 일제 조작설은 대부분의 학자들에게 인정받지 못함을 알 수 있다. 위에서 거론된 속설[*⒜]의 공통점은 최소 50년대~80년부터 인용된 자료를 2019~2020년에 '최근 발굴'이라고 소개한다는 것이다. 학계를 반박하지 못하니 '사료가 최근에 발굴됐다.'(그러니 전문가들이 인용 못 했다.)고 왜곡하는 것이다. 그리고 2019년에 퍼진 주장은 사실 이태진의 주장도 아니다. * 정설과 논란에 대한 허위정보 ---- * 아무튼 논란이다? 사실관계가 아니라 '논란이 있으므로 확신할 수 없다'는 식으로 나오기도 한다. [[아몰랑|물론 어떻게 논란이 있다는 건지 학계 논의나 사료발굴 시기에 대한 증거는 없다]]. 유일한 증거는 이 속설[*⒜](...) 학계의 정설을 반박하지 못하는 아마추어[*⒜]들은 '논란이다', '학계에서도 갑론을박이 오간다.', '전문가들도 무엇이 사실인지 심하게 갈린다'는 식으로 말장난을 남발하며, 그것도 모자라 자칭 '[[논란]]'이란 것을 정설을 부정하는 근거로 사용한다. [[아몰랑|그러나 그들의 자칭 '논란'의 출처는 블로그, 트위터 썰 외에는 없다.]] 위에서 인용된 이태진의 논문에 대한 설명을 보라. 이태진도 분명 본인이 기존 정설과 반대된다고 했지 '논란'이라는 주장은 전혀 하지 않았다. 이 속설[*⒜]의 주장을 정리하면 '아무튼 정설을 부정하는 학자가 있으면 무조건 논란이다. 논란이므로 사실관계를 확신할 수 없다.'는 황당한 논리구조이다. 나무위키 문서에선 속설을 학계의 논문공세로 비판한 탓에 외부 역사 커뮤니티 일각에서는 [[https://m.dcinside.com/board/rome/719162?|킹무갓키의 사례]]로 평가하기도 한다.[[https://archive.ph/FBLu7|#]] ~~이정도면 전공자가 빡쳐서 레포트 던지고 간 수준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